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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너그는 뭐든 저지를 수 있다
BY 민들레2023-01-26 01: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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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아선 ‘거짓말’, ‘앞뒤 말의 모순’, ‘지킬 수 없는 약속’, ‘위험하고 어리석은 발언과 행동’ 등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금방 윤석열 대통령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저 표현은 1930년대 초 히틀러에 대해서 했던 말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급이 다르긴 하지만 히틀러와 윤석열이 최고권력에 오르는 과정은 제법 닮은 구석이 없지 않다. 둘 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정치인에서 단숨에 권력의 최정상에 올랐으며, 발언과 행동이 어수룩해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 대상이라는 점이 많이 닮았다.

히틀러와 윤석열

1919년 정치를 처음 시작한 히틀러는 그 후 줄곧 무시당하고, 과소평가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외모와 언행을 가리켜 그가 기차역 식당의 웨이터나 이발사 같아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나치 집단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해도 노회한 정치가들은 “바보 같은” 히틀러를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을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정치를 시작한 지 불과 14년 만에 권력 최정상에 올랐고, 불행히도 그것은 전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을 안기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검찰총장 시절 이른바 ‘조국 사태’를 촉발하고 후임 추미애 장관과도 갈등을 유발하여 한창 언론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가 설마 대통령까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중에 대통령선거에 뛰어들어 그가 보여준 모습은 누가 봐도 나라를 이끌 만한 지도자감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당선되었고, 취임한 지 채 1년이 안 되었음에도 벌써 ‘대통령 리스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태로운 폭주를 거듭하고 있다.

급기야 윤 대통령에 대해 ‘탄핵’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히려 더 노골적이고 대담하다. 윤 대통령은 갈수록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있는데도 정적 죽이기와 노조와 언론 탄압 등 권력의 독점과 확대에만 몰두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과 핵전쟁을 운운하고 국제무대에선 주워 담을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을 저지르며 나라를 점점 커다란 위험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취임 후 8개월 동안 보여준 윤 대통령의 모습은 ‘묻지마 범죄’를 떠올릴 만큼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나라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탄핵을 당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윤 대통령의 탄핵은 시간문제일 뿐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불길한 생각이 앞선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윤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그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90여 년 전 독일에서도 그랬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인들은 순진하였다.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예술과 철학에서 유럽을 리드하고 있던 독일 같은 문명국가에서 누가 히틀러 같은 사람에게 투표하겠는가 라는 자만심이 있었다. 막상 히틀러가 당선되자 이번엔 많은 독일인들이 그의 재임 기간은 짧을 것이며, 별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히틀러가 총리로 등극한 1933년에 트레블링카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상상할 수 있었던 독일인은 아무도 없었다.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파시즘의 먹구름

어두운 코로나 터널을 지나면서 전 세계에 ‘K 신화’를 강렬하게 남기지 않았던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되었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곳곳에서 실감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시선을 느꼈고, 과학기술, 음악, 예술, 스포츠, 대중문화 등에서 한국인의 기량이 만개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또다시 ‘이게 나라인가’라는 절망 섞인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국가적 위기 조짐은 단순히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구조적 상황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유럽의 파시즘이 창궐할 때와 매우 흡사하다. 그것이 대공황 이후 실업과 빈곤 위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났듯이, 지금의 세계도 심각한 경제불황과 양극화, 중산층의 몰락, 정당의 무력화 등 파시즘의 정치경제적 토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까지 겹쳐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전 세계는 그야말로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의 수렁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사회는 점점 극우 보수화되고, 사회 집단 간 증오와 혐오는 격화되고, 그에 따른 폭력도 빈번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사회구성원들을 통합해줄 수 있는 정치적, 도덕적 이념도 희미해지면서 사회는 갈수록 사분오열되어 무질서의 엔트로피가 증대하고 있다.

이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도무지 해답을 찾기 힘들 때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는 집단심리 증상을 보인다. 문제를 단칼에 해결해줄 것 같은 ‘구세주’ 지도자를 찾는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그것도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에서 비상식적인 이상한 지도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만 발생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새로운 대안처럼 파시즘이 등장하는 것이다. 풍족하게 살던 시절의 욕망을 채울 길은 점점 막막해지는데 정치는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런 문제해결 능력을 보이지 못할 때,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정상적인 방식으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비상식과 비합리성으로 눈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파시즘은 이러한 대중심리를 자극하고 악용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더욱 독점하고 확대하는 데만 골몰한다.

사실 뜻밖에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더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지금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 안심해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처럼 야당이 민주적 합리성에 갇혀 실질적인 문제해결의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상황변화의 키는 윤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는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선동한다. 누적된 복잡한 사회모순을 한꺼번에 뒤집어엎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전쟁이라는 ‘예외상태’를 만든다. 기존 정치인들을 깨끗이 청소해야 할 쓰레기로 몰아붙이고 자신은 청렴하다는 걸 내세운다. 모든 걸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단순명료하게 갈라친다.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여 모든 걸 강탈할 거라며 자본가와 중산층의 불안을 부추긴다.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를 추구한다. 과거 찬란했던 시절을 상기하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꿈꾼다. 극우 폭력조직을 거느리고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게 백색테러를 가한다. 그리고 친위언론을 앞세워 언어 상징을 조작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사회를 획일화한다. 이러한 파시즘의 특징들은 1930년대에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실제로 벌였던 일들이다.

더 늦기 전에

그런데 저런 모습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가운데, 윤 대통령은 정치라는 밥상을 뒤엎어버리고, 오직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모든 걸 재단한다. 윤 대통령은 걸핏하면 법과 원칙을 내세워 검찰과 경찰을 동원하고 아스팔트 극우 세력을 돌격대로 활용하고 있다. 반공을 앞세워 야당과 민주진영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한편, 북한과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며 기어이 무력충돌도 벌일 기세다.

이러는 윤 대통령이 연설 때마다 ‘자유’라는 말은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만인이 정치적으로 자유로운’이 아닌 ‘자기만 자유로운’이라는 뜻으로 쓰는 것 같다. 이것은 조지 오웰이 쓴 <1984>에서 권력자가 기존의 낱말 뜻과 전혀 다른 신조어를 만들어내 사람들의 의미체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1984’에서 비밀경찰 오브라이언이 윈스턴 스미스에게 고문을 가하며 손가락 네 개를 다섯 개라고 강요하듯, 윤 대통령은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사람들의 의식에 최면을 건다. 이게 다 친위언론이 여론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언론 자유는 치명적 죄악”이 될 거라는 오웰의 예언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의 폭주를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다음 선거에서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실현되기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길 바라지만 만약을 염두에 두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실패한 반민주적 국가권력일수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더 독점하려 들고 연장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은, 돈은 나눌 수 있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출현을 보며 말했던 조지 오웰의 통찰이 놀랍다. “봉건주의가 끝날 무렵 ‘돈의 사람’이 등장했다면, 자본주의 말기에는 ‘권력의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락과 사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압제에서 오는 희열이다. 더군다나 지금 대통령 부인과 정신적 멘토라는 윤 대통령 주변 사람들마저 ‘권력 놀이’에 취해 있다고 한다면 권력의 폭주가 어디까지일지 가늠조차 힘들다.

따라서 지금 윤석열 정부가 그럴싸한 목적이나 신념도 없이 반민주적인 권력 독점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권력의 폭주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가 지금 우리의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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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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